독립투사재산 찾아주고 재단 만들어 대한민국 바로 세우자...

“내 목숨은 끊을 수 있지만, 무릎을 꿇어서 종이 될 수는 없다.”

우리 힘으로 독립 쟁취 못해,

친일파 대한민국, 남북 분단되다...

조선최대 갑부, 독립전쟁에 재산 다 쏟아 붓고,

먹을 것 없어 굶어 죽다...

 

북한이 다시 서기2017.07.28. 늦은 밤을 기해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았다. 지난 4일에 이어 두 번째 실험이다. 이번에는 3천 길로 미터가 더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대략적으로 1만 킬로미터까지 날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미국 본토를 직접 핵탄두를 실어 타격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한 자위적 조치라고 한다. 이에 문재인 정권은 가만있지 않겠다며 지난번과 같이 미사일발사로 대응했다. 그러면서 이미 박근혜 정권에서 들여온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장비를 추가로 배치하겠다고 한다. 가급적이면 미루려고 했는데 북한이 계속 ‘도발’을 하고 있으니 할 수없이 사드배치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중국에도 통보했다고 한다. 72년 동안 벌어지고 있는 이 남북대결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분단이 가져다 준 민족적 비극이다. 분단은 일제식민지배의 결과물이다. 또한 우리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비극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조직해서 무수한 독립투사들이 생명과 전 재산을 바쳐 일제와 싸웠다. 그러나 해방은 독립투쟁세력이 주도하지 못했다. 일본이 예상외로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8.15 광복에 우리의 힘을 투입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남한은 일본이 항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군 정부에 의해, 이승만과 조선총독부 밑에서 개, 돼지 노릇하던 친일파가 장악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독립투사들의 활약이 묻히고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죄인처럼 숨어서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72년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민간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있어 주목되고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 주도로 독립투사재산 찾아주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종합누리망 '다음(daum)'에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올리고 후원금을 받았는데 예상외로 후원금이 많이 모아졌다. 이 후원금을 종자돈으로 해서 독립투사재산을 찾아 함께 재단을 만들어 국가가 못하는 다양한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서기2017.07.26. 홍대입구 전철역 근처 카톨릭청소년회관에서 후원금 모집 성공 강연회가 있었다. 이날 강연회 주 연사로 나선 이덕일 소장은 후원금 모집 성공을 의미 있게 바라보았다. 가장 큰 의미는 우리나라가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가 온통 친일매국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 대척점에 있는 독립투사 재산찾아주기 운동에 후원금이 몰리고 후원 성공 강연회에도 시민들이 강연장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참여한 것은 큰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민낯을 독립투쟁사와 연계하여 고발하고 있다

이 소장은 후원금 모집과 독립투사들의 재산을 찾아서 어려운 후손들을 지원하는 것은 기본이고 환수된 막대한 재산을 각자 나누어 소진하기 보다는 재단을 만들자고 역설했다. 재단을 만들면 다양하게 쓰이는데 교육사업과 언론사업 기타 여러 가지 사업을 통해서 친일파가 장악한 대한민국을 새롭게 일신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전 재산을 팔아 독립투쟁에 쏟아 부은 가문들...

이 소장은 독립투자재산을 왜 찾아 주어야 하는지 독립투사들의 피맺힌 투쟁사를 현장감 있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파악된 대표적인 독립투쟁가문과 개인을 들었다.

먼저 이석영이라는 당대 최고의 부자를 예로 들었다. 그는 독립투쟁에 전 재산을 다 쏟아 붓고 나중에 상해에서 굶어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어 비교적 많이 알려진 우당 이회영 일가의 비참한 생활을 소개했다. 우당과 같이 ‘아나키스트(폭력정부 거부주의자)’였던 정연석 선생이 당시 상해로 가는 길에 천진시에 있던 우당 이회영 일가가 사는 집을 들렀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온 식구가 굶어서 누워 있었다. 있는 옷가지도 모두 전당 잡혀서 식구들이 밖에 다닐 옷도 없었다. 굶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집안은 나라가 망하자 만여 석의 재산을 다 팔아서 압록강을 건너 독립투쟁기지를 건설했다.

백하 김대락 집안과 석주 이상룡 집안도 마찬가지다. 이 집안들은 당대 최고의 부자들로 명성이 나 있었다. 그런데 경술국치(서기1910. 이른바 한일합방)이후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이동해 초기 독립투쟁의 불꽃을 피운 신흥무관학교를 건설한다. 여기에서 배출된 군관들이 독립군을 결성해 일제와 만주에서 전쟁을 벌인다. 그 대표적인 전쟁이 청산리 전투다. 병력과 장비가 절대적으로 열세였는데도 일본군 1개연대를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독립투사와 그 집안이 당시 얼마나 피눈물 나는 생활을 했는지 그 후손의 며느리나 살아남은 동지들이 남김 회고록이나 자서전에 자세히 나온다.

석주 이상룡의 저철한 독립투쟁...

석주 이상룡과 그 일가의 행적을 적은 <서사록>이라는 것이 있다. 이덕일 소장은 독립투쟁사 얘기를 할 때 많은 부분을 <서사록>에서 따온다. 이날 강연에서도 <서사록>에 나오는 이야기를 사실감 있게 전달해 주었다.

나라가 망하자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안동에서 걸어서 혼자 추풍령까지 왔다고 했다.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차타고 서울까지 가고 여기서 다시 신의주까지 가서 가족을 기다렸다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석주 선생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절절하다.

“내 목숨은 끊을 수 있지만, 무릎을 꿇어서 종이 될 수는 없다.” 라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 이덕일 소장이 독립투사들의 투쟁사를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고려시대에도 등장하는 고성이씨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 머리역사를 알려주는 <단군세기>를 쓴 고려 말기 재상을 지낸 행촌 이암 선생의 후손이다. 그래서 인지 석주 선생은 역사를 강조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제일 중요하게 가르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국사교육이었다고 한다. 역사교육을 통해서 정신무장을 투철하게 했다. 그 결과가 청산리 전투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일본군 1개 연대병력을 전멸시키는 전과로 나타났다고 이 소장은 분석했다. 그러나 이렇게 싸웠지만 일제는 날로 강성해졌고 만주는 점차 일제의 손아귀로 들어간다. 이러한 슬픔을 연설로 남기기도 했다. ‘(가산을 팔아) 수백만 원의 자산을 텅 빈 골짜기에 쏟아 부었지만, 조국 강토는 한 뼘도 회복한 것이 없고, 수천수백의 원혼들만 황야에서 부르짖고 있다.’ 는 절규다.

석주 이상룡선생의 손자(이병화) 며느리가 남긴 자서전에도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서간도 벌판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온 구십 평생을 되돌아 봐도 여한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 연명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뿐이다.

고달픈 발자국이었긴 하나 큰일하신 어른들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분이다.”

이상룡 손자(이병화) 며느리, 허은의 회고록“아직도 내 귓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당시 독립투쟁이 한 개인의 특출한 싸움이 아니라, 그 집안의 총력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광복 후 독립투사 후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갔는지 알 수 있는 내용도 나온다.

▲ 전 재산을 팔아 독립투쟁에 쏟아 부었지만 광복된 조국은 철저하게 외면했고, 죄인 취급했다.

종부리며 살던 명문가문 화전민으로 살아가다...

“여기저기 물어 왕산(허위 의병장)댁부터 찾아 들어갔다. 고향에서는 큰 기와집에서 종부리고 벼슬하며 사시던 분인데, 막상 뵙고 보니 너무나 초라했다. 산비탈 토굴 같은 집에서 방 두칸 마련하여 이방 저방 무리지어 거처하고 계셨다. 산전을 개간하여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이 글에서 이어지는 소망은 해방되면 독립투쟁을 추억삼아 옛날이야기 하면서 오순도순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일파가 재집권하고 독립투쟁세력은 모두 몰락해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처참하게 숨어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후손은 ‘모든 것을 바쳐 조국광복을 위해 싸웠건만 하느님도 무심하지 어떻게 이렇게 비참하게 버리냐’며 절규했다고 한다.

이덕일 소장은 이날 강연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식민사학 ‘패거리들’의 매국행위와 이들과 짜고 이 소장을 공격하는 ‘조선총독부 기레기’ 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이 소장은 지금 우리는 조선총독부치하와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친일반민족행위정국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 때 상황이 그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조금만 깨어있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다. 대다수 일반국민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나라 팔아먹은 노론과 조선총독부 후예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친일파가 우리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돈과 권력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들이라는 것이다. 역사학분야도 마찬가지인데 이덕일 소장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이조선 후반기 집권당인 노론당의 사관과 식민사관을 진짜로 비판하니, 식민사학계는 물론이고 자칭 진보라고 하는 언론까지 달려들어 죽이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어떤 구조로 장악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이 사회에서 통하려면 비판하는 척만 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식민사관 비판했다고 진보언론이 달려들어 죽이겠다고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유럽 프랑스에서 나치독일 비판했다고 진보언론이 나서서 죽이겠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느냐며 지금까지 이덕일 소장을 매장하려 드는 한겨레21, 경향, 한국, 한겨레신문 등 자칭 진보언론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는 해방 후 이승만이 고착시켰다고 고발했다. 서기1949.06.3. 제헌의회에서 소수당으로 전락한 이승만이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자 이른바 ‘국회쁘락지’ 사건을 일으켰는데 국회 내 남로당 소속의원을 색출하겠다며 국회를 탄압했다. 이어 서기1949.06.4. 애국 계몽대라는 집단을 동원하여 친일파척살을 목적으로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사무실 앞에 모여 위협했다. 이어 친일경찰을 시켜 반민특위 특별경찰을 강제 해산 시켰다. 나중에 이승만은 이것을 자신이 시켰다고 미국 에이피 통신에 자랑스럽게 밝혔다. 그리고 서기1949.06.26. 백범 김구를 육군 소위 안두희를 시켜 암살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이 사건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구조가 지금도 그대로 살아있고 이들 실체를 진짜 비판하고 고발하려고 하면 이 구조가 작동하여 사방에서 달려들어 죽이려고 난리친다고 분석했다. 이 소장은 이러한 구조적인 세력과 맞서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독립투사들의 재산을 찾아주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이 구축되는데 이 돈으로 재단을 만들어 친일적폐세력을 청산하자고 역설했다.

▲ 이날 강연회에서는 12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하여 독립투사들의 광복투쟁을 새겼다. 이를 주도하고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후원하자는 열기도 뜨거웠다.

이날 강연에서 이덕일 소장은 자신이 독립투사였다. 그리고 이 독립투쟁의 뜻에 공명한 수많은 시민들이 이날 행사장을 가득 매웠다. 이 소장의 소원대로 막대한 재산으로 재단이 만들어지면 본격적으로 친일적폐세력과 대등한 수준에서 독립투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이날 행사장에서는 자발적으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 후원을 하겠다며 기부용지를 가지고 가는 시민들이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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