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이 국가를 분열시켜"

종로구 신교동에 있는 우당기념관에서 이종찬 전 국정원장(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추진위원장)을 만났다.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기도 한 그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역사바로세우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실제로 독립운동사와 역사자료로만 빽빽하게 채워진 널찍한 사무실은 그의 역사에 대한 집념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든 가까운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나는 1936년에 상해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부모님은 1927년에 북경에서 상해로 갔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고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과 아버지(이규학, 1896~1973)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딸 하나 젖먹이 아기를 키우고 계셨기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어서 상해에 그대로 남아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1932년 대련에서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셨고, 삼촌(이규창)은 1935년 상해에서 엄형순 선생과 재일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있던 친일파 이용로를 처단하러 나섰다가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셨어요. 그후 엄형순 선생은 사형당하고 삼촌은 장기복역하는데 이런 일이 겹쳐서 상해의 우리 집안도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0일 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호치민처럼 생긴 사람이 노타이 바람으로 우리 집에 왔습니다. (호치민 :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당시 아버지는 잠깐 잠깐 방문하면 다락방에 숨어있었는데, 그분은 아버지하고 잠깐 말씀을 나누더니 바람과 같이 사라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화암 선생이었습니다. (정화암 :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을 이끌고 있던 직접 행동가. 1945년 8·15 광복 뒤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 평소에 과묵했던 아버지였지만, 그날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였습니다. “일제는 끝났다. 일본이 곧 항복하고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화암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당시 다락방에 있던 놋그릇 재떨이에 종이를 태운 재가 수북이 쌓여있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고문을 당해서 귀가 잘 안 들렸기 때문에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을 증거를 없애기 위해 태운 것이었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

상해의 우리 집은 3층집이었는데, 지금으로 하면 연립주택입니다. 어머님이 어렵게 마련한 집이었는데, 원래 우리가 1층을 쓰고, 2층에는 중국인에게 세를 줬어요. 그런데 일본인들이 강제로 1층에 세를 놓으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우리는 3층에 살았습니다. 그때 1층에 세 들어온 사람이 히라가와(ひらかわ, 平川)였습니다. 일제의 지시를 받아 우리를 감시하는 게 주요 업무였는데, 그는 아편장사도 겸했습니다. 일제가 우리 집을 감시하는 대신 아편장사를 하게 허락해준 것이죠. 사람들이 1층을 들락날락하며 아편 냄새를 맡고 의자에 누워있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 나는 그 사람들처럼 아편 들이마시는 모습을 흉내냈다가 어머니한테 걸려서 죽도록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 히라가와는 아무 말없이 종적을 감춰버렸습니다. 당시 우리집의 주 수입원이 1층 월세였는데, 어머니는 1층 월세를 받지 못해서 생활이 어려워졌음에도 매우 기뻐하셨고, 1층을 아예 손님들을 대접하는 응접실로 사용했습니다. 최근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 작업을 위해 당시 자료를 조사해봤는데, 그때 벌써 상해에서 돈이 많았던 친일파들이 교민회를 구성해서, 자기들이 교민회 간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국광복을 환영 한다”고 오히려 선수를 쳤습니다.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일장기가 태극기로 바뀌었다고 어이없어 했는데, 결국 광복군이 들어와서 친일파들이 만든 교민회를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이때 혼란기에는 악화가 양화를 쫒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임정요인들을 환영하는 사람들. 가운데 꼬마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고 그 뒤가 백범 김구, 오른쪽에 중절모를 쓰고 눈물을 훔치는 분이 작은 할아버지인 성재 이시영 선생이다.

 

- 귀국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해방이 되고 우리는 쉽게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중국의 장개석 정권은 우리의 독립운동을 인정했습니다. 임시정부를 인정했지요.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식으로 귀국을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난민선 타고 1946년 5월에야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임시정부의 국내 환국사진으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은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상해에 도착한 후 3주간 머문 적이 있습니다. 이 사진은 상해공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국내에 들어오면서 괄시도 많이 받았습니다.

 

- 어떻게 괄시를 받으셨나요?

우리 어머니(조계진,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는 국내 귀국한 후 ‘중국할머니’로 불렸어요. 옷이 환국할 때 입었던 중국 옷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죠.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사람들의 처지가 다 그랬어요. 경기고 졸업 후 육사를 시험 봤어요. 대학 학자금을 낼 돈이 없어서 육사를 선택했지요. 면접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당시 육사에 가려면 추천서가 필요했어요. 국장급이나 장군이상의 추천서를 2장 제출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는 분이었던 광복군 출신인 해군 민영구 제독(민필호 조카, 김준엽의 사촌처남)과 김관호 장군의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면접관 중에 일본군의 오장 출신이 장군이 되어 있었어요. 그 면접관이 “민제독과 김장군은 어떻게 아나?”하고 묻는데 벌써 목소리가 좋지 않아요. 나는 할 수 없이 “집안하고 세교가 있습니다.”라고 답했죠. 그러자 “그러면 귀관의 집안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고 많이 떨렸다.) 면접관이 그렇게 강하게 말하니 주눅이 들어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알았어. 나가!” 시험에 떨어진 줄 알고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해야 하나 마나 하고 고민을 하다가 말씀 드렸어요. 화가 난 아버지는 민제독의 아우인 민영완(이시영 부통령 비서)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독립운동한 게 무슨 죕니까?”라고 항의했어요. 그래서 민영완에게 이야기를 들은 당시 이종찬 장군이 육사에 전화해서 “앞으로 그렇게 하지마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육사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손녀(윤주경 현 독립기념관장)가 어린 시절 학교에 갔는데, “쟤는 윤봉길 손녀래. 쟤하고 놀지 마” 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린나이에 윤봉길 의사 손녀라는 사실이 죄가 되는 줄 알고 부끄러워서 숨겼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다녀와서 부모님이 위로차 경교장에 방문했습니다. 남북협상이 실패한 것을 다 아니까 그 문제는 서로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북한이 혁명 유자녀에 대한 배려는 철저했다.”면서 부러워했습니다. “우리도 정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일제 때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독립운동 후손들을 돌봤습니다. 비록 나중에는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숙청을 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혁명 유자녀를 크게 높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명분상으로 북한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여기게 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 국사편찬위원회 건물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셨다고 하는데.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예장동에 살았습니다. 하루는 고 이현종 국사편찬위원장이 집으로 찾아와서는, 국사편찬위원회를 방문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잖아도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던 차였습니다. 또한 집에서 걸어갈 정도의 거리여서 한번 가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KBS 별관 하나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사료를 나무 칸막이 같은데다 쌓아 놔서 불 한 번 나면 모두 불타버릴 것 같았습니다. 한 나라의 진짜 모습은 역사를 어떻게 대접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인데,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았습니다. 당시 민정당 원내총무였으므로 먼저 예산에 포함시키고, 과천에 땅을 사서 국사관을 지었습니다. 그때 학자들을 접해보니 한국 역사가 식민사관에 병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상해에서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께 역사를 배웠어요. 독립운동하던 어른들은 대부분 역사에 해박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죠. 이분들께 어려서부터 역사 이야기를 들었으니 자세한 것은 몰라도 한국사의 본래 모습이 어떠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국사관을 짓는 과정에 학자들을 만나보니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과 아주 다른, 식민사관에 병들어 있었습니다. 이래서 “더 이상 안 되겠다” 해서 준비한 것이 국사교과서 공청회였습니다.

 

- 그래서 국사교과서 공청회를 준비하셨군요. 그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재야사학자들로는 안호상, 임승국 등이 나왔습니다. 반대편엔 쟁쟁한 대학의 학자들이 나왔습니다. 이 학자들이 랑케의 역사관을 이야기하는데, 재야학자들이 제대로 답변을 못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재야사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 강단 사학자들에게 학문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후 단국대 윤내현 교수를 처음 만났습니다. 윤내현 교수가 자세히 설명을 해줘서 이쪽도 공부가 된 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작 윤교수를 알았다면 미리 준비를 시켜서 공청회가 달라질 수 있었을텐데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후 북한 역사를 배겼다고 윤내현 교수가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듣기도 했습니다.

그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재야사학자 안호상 씨가 강단 교수들을 보고 “이 사적(史賊:역사의 도적)들아”라고 호통치면서 “단군의 역사를 반토막을 낸 놈들” 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강단학자들도 이렇게 인격모독을 하는 자리에 우리가 나올 필요가 없다고 반발해서 당시 한병채 씨가 중간에서 곤욕을 치뤘습니다. 한마디로 역사를 팔아먹은 혐의는 있는데, 증거는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한 20년이 지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 내막과 이론을 알게 되니 가슴속 응어리가 풀렸습니다. 강단사학자들이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왜곡하면서 식민사관을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지금은 저 사람들 학술토론회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도 식민사관을 극복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료집 몇 권을 서재에서 꺼냈다. 공청회 이후 여러 역사학자들이 자료를 많이 갖다줬다고 했다. 그 중 사고전서의 동이사료 등이 있다면서 서가를 가리켰다)

서재에서 사료집 몇 권을 직접 꺼내 보여주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

 

- 의열단 출신 유석현 선생을 민정당 고문으로 영입하셨습니다.

의열단의 기본은 신흥무관학교 학우단이었어요. 신흥무관학교를 나오면 학우단에 가입해서 2년 동안 봉사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신흥무관학교를 나왔거나 중퇴한 분들이 의열단을 만들었어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 의열단 선언문입니다. 의열단의 김원봉과 류자명 선생 등이 자신들이 목숨 걸고 일제와 싸우는 대의를 써달라고 해서 써 준 것인데, 명문입니다. 읽으면 속이 시원해요. 의열단에는 아나키스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열단은 북경시대에 우리 집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당시 나석주, 김상옥 의사 등 일제와 총격전을 벌이고 산화했던 분들이 다 북경시대에 우리집과 관련이 있던 분들입니다. 우리 할아버지(이회영)은 나석주 의사 사건이 나고 일제가 체포하러 오니까 걸어서 산동반도까지 피신했어요. 그리고 우리 숙부(이규창)와 친하게 지낸 분이 유석현 선생이었습니다.

민정당을 창당할 때, 기성 정치인을 묶어놓고 당을 만드는데, 나중에 역사에서 평가받을 때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런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소신껏 해보라고 해요. 그래서 제일 먼저 사직동 여관에 있던 유석현 선생(의열단 사건으로 8년 복역, 석방 후 다시 만주로 망명.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을 찾아뵈었습니다. 집한 칸 없이 여관살이를 하고 있었죠. 찾아가서 절하고 무릎 꿇고 앉으니 유선생은 “나는 일제 때도 요시찰, 자유당 때도 요시찰, 공화당 때도 요시찰인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텐데 왜 찾아왔냐?”고 해요. 제가 무릎 꿇은 상태로, “요시찰 인물이어서 찾아왔습니다. 요시찰 인물들이 주역을 해주셔야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창당 작업하면서 중간보고할 때 제가 이야기했어요. 이런 분들을 모셔놓고 창당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시고도 소외된 분들이 함께 하는 정치가 ‘새로운 정치다’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유석현 선생이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유 선생은 송지영, 윤길중 같은 분들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래서 내가 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셨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보다는 일종의 파도를 타며 얻은 기회였기 때문에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친구인 백낙청에게, “너는 나쁜 짓했다. 왜 민정당이라는 나쁜 정당 만들어서, 유석현씨와 같이 일생을 결백하게 살아온 분들께 먹칠을 했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릅니다. 그런 분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그 분들의 생각이 펼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냥 이름 없이 돌아가시면 그것은 비참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예컨대 백범암살 진상조사단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전봉덕이라고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보호하던 헌병사령관이 있었는데, 제가 한 번은 그 집 앞을 지나다가 내려서 문패를 봤습니다. 그때 변호사를 하고 있었는데...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 없어졌어요. 백범암살 진상조사단이 만들어지니까 미국으로 도망가 버린 겁니다. 역사에는 이런 측면이 있어요. 한쪽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석현 선생 같은 분들의 한 마디가 씨앗이 되어 번져갑니다. 그것이 싹이 되어 대세를 이루는 것이라고 봅니다.

김구 선생을 존경하지만, 솔직히 그분의 현실정치에 대해 찬동하지는 않습니다. 1948년의 5.10 제헌선거에 참여했어야 했습니다. 그때 백범이 한독당을 이끌고 선거에 참여했으면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참여 안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요즘 당시의 숙군(군부 내 숙청작업)이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 일제 강점기 시대 반민족적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서 제헌국회에 설치한 특별위원회)의 역사를 보니,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를 때려 부술 수 있는 빌미를 준 것이 백범의 남북협상이었습니다. 국회프락치 사건도 그랬습니다. (국회프락치 사건 : 1949년 6월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공작원)'가 제헌국회에 침투했다는 혐의로 독립운동가출신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3명의 의원을 체포한 사건. 반민특위 강제 해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

김구는 현실정치에 어두운 면이 있었습니다. 혁명가, 지사적인 면이 너무 강했지요. 미국하고 충돌하고 송진우, 장덕수 같은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설정하지 못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해서, 잘 한 것과 잘못한 것을 공과를 놓고 평가해야지 하나에 치우쳐서 우상을 만드는 것은 안 된다고 봅니다. 지금 일각에서 독립운동을 김구가 다하고 안창호가 다했다고 하는 식의 움직임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균형 있게 밝혀줄 필요가 있습니다.

 

- 요즘 영화 ‘암살’이 화제입니다. 유석현 선생에게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다던데.

민정당 창당 준비를 할 때, 유 선생은 “김원봉이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나왔는데,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그를 아꼈습니다. 그래서 장개석은 김구를 불러서 “5당연합을 해라. 김원봉을 집어넣어라.”라고 했더니 백범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겁니다. 장개석이 “말 안 들으면 내가 김원봉을 설득하겠다” 할 정도로 김원봉을 신임했습니다. 그만큼 뛰어났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그 약산 김원봉이 일제 고등계 경찰출신 노덕술에게 종로 한 복판에서 체포되어 수모를 겪었습니다. 김원봉은 ‘여기가 일제냐’라고 항의했고,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이 할 수 없이 풀어주었습니다. 김원봉은 유석현의 집을 찾아가 며칠 밤낮을 울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김원봉은 “내가 여기서 못살겠다”라고 하면서 남북협상 때 김구를 따라가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김원봉은 북한에서 ‘남의사’(중국 국민당의 비밀 정보조직)로 몰아서 반대파에서 처참하게 제거했다고 합니다.

 

- 우당기념사업회에서 강연도중 임나일본부 관련해서 역사논쟁으로 소동이 있었고, 공교롭게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도 그 강연자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고 합니다.

작년 우당 기념강좌에서 김현구 씨(고려대 명예교수)를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임나일본부를 전공한 전문가라고 해서 강연 요청을 했습니다. 한국사람이 임나일본부를 전공했다니까 당연히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할 줄 알고 초청한 것이죠. 사회자가 “임나일본부설의 뿌리를 해체한 분입니다”라고 소개했어요. 그런데 막상 강연이 시작하니까 김현구 씨가 마치 국내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때 청중들이 나이가 많은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이 저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연이 잘못된 내용인 줄 모를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강연 도중에 막 질문이 쏟아집니다. 우당 기념강좌에서는 처음 있던 일입니다. 청중 중 한명이 “당신 김석형 씨 글은 읽어봤냐”고 질문할 정도였습니다.(김석형(1915~1996).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태어나 월북한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 1963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사람들이 일본에 이주하여 각각 분국을 세웠다는 ‘분국설’을 주장. 삼국과 가야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분국을 세워 본국과 교류했는데, 4세기 무렵, 야마토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정권이 분국 중에서 임나를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것이라는 내용임)

김 교수는 “김석형은 공산주의자입니다.”라면서 “독창적 이론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뒤 뒷받침이 안되어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라고 무시해버렸어요. 그러니까 한 청중이 독도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는 것이죠. 처음 답변을 안 하니까 다른 청중이 또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독도전공자가 아니라 답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자기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인데, 동북아재단에서 서울법대 교수를 모셔다가 독도문제에 대해서 강연을 했다. 그때 강연 들은 학생들이 "듣고 보니까 독도는 일본 것이네요.”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일본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우리 것만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 나도 큰 충격을 받았고, 청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내가 초청자인데 올라가서 끌어낼 수도 없고 너무 화가 나서 도중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으로 나와 차 한잔 마시고 속을 삭히고 있는데, 예정 시간 보다 강연이 일찍 끝났어요. 청중들이 항의하니까 강연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한 겁니다. 다들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60대 아주머니가 김현구 씨를 잡고는, “그걸 강의라고 했어?” “여기가 어딘줄 알아?”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봤습니다. 그 순간 ‘아! 백성이 깨어나야 나라가 흥한다.’(우당 이회영의 말)고 했는데, 백성이 깨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구렁텅이에 빠지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김현구 씨가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 이덕일 소장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지검에서 무혐의처분한 것을 고검에서 뒤집고 기소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나라가 왜 이렇게 가나 참담한 생각이 듭니다. 요즘 독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는데 우울합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에 독도를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학자들이 대거 늘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이제는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내놓은 동북아역사지도를 보면, 놀랍도록 조선사편수회의 주장과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제 이홍구 전 총리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한마디 했어요. ‘김학준(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학자가 아니다. 풍전세류(風前細柳,바람 앞의 하늘거리는 가는 버드나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어떻게 동북아역사재단을 저렇게 망쳐놓을 수 있느냐? 아무리 망쳐놓은 곳에 들어가서 제대로 일을 하는데 한계가 있더라도, 그래도 제동을 걸면서 민족적인 양심을 갖고 해야지 이럴 수가 있는가?’ 라고 물어봤어요. 이 전 총리는 입맛을 다시며 ‘그 사람이 좀 약한 사람이죠’. 라고 합디다. 오히려 신용하 교수라면 한다는 거죠. 마침 국회 새누리당 이주영 의원이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는 분이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서 이러한 사정을 미리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역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이 나라 큰 일 납니다.

 

- 그동안 읽으신 역사관련 책중 추천할만한 책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요?

예전에 구해놓고 요즘 읽는 책이 박갑동씨가 쓴 <갈수록 멀어지는 공화국>이라는 책입니다. 남로당이 얼마나 처참하게 김일성에게 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남로당의 역사나 존재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최근 이병주 씨가 쓴 남로당 소설 3권을 읽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해서 박갑동씨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얼마나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진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반공의 시각에서 남로당을 접근한 것이 아니어서 괜찮았습니다.

 

-임시정부 기념관 설립추진위원장도 하고 계신데

최근 내가 임시정부 기념관 설립 추진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박대통령이 상해 임시정부 기념관 재개관 참석하러 가기 전 청와대 이병기 실장한테 연락을 해서, “임정 기념관이 여러 개 있다. 상해에도 있고, 중경에도 있고, 파리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다. 해외에는 있는데 국내에는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집한 사진과 자료를 보냈습니다. 실제로 임시정부 기념관을 국내에 설립하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부지 확보를 위해서 박원순 서울시장도 만났고, 예산에도 반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즘 ‘종북’이다, 뭐다 하는데 다들 이 나라의 정통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임시정부기념관을 만들어 놓으면, 그래서 이 나라의 정통성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다른 것 갖고 싸울 일이 없다고 봅니다.

내가 어제 이홍구 전 총리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독립운동가 기념관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데, 임시정부기념관을 지어서 모두 들어오게 만들자. 이승만, 김구, 여운형, 안창호 등도 전부 들어오게 하자. 다 들어와서 역사적으로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요즘 <암살> 이라는 영화가 뜨면서 김원봉의 신흥무관학교에 대해서 나에게 많이 물어보는데, 나는 김원봉도 임정기념관에 들어와야 한다고 봅니다. 김원봉이 귀국 당시 임정 군무부장, 즉 국방부장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김원봉도 역사적으로 재조명해야 합니다. 이런 역사를 바로 잡는 정당한 사업을 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 이승만이 건국을 했다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니, 이런 사람들이 국가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것은 광복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 아닙니까? 독립운동사를 부정하는 것 아닙니까?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이 누구예요? 바로 이승만 박사 아닙니까?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만들면 이승만 박사 자신의 독립운동사도 사라지는 겁니다. 역사를 똑바로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이야기입니다. 고대사도 마찬가집니다. 이홍구 전 총리도 나에게 말하길 “박은식과 신채호의 역사만 바로 세워도 고대사는 끝나는 일이다.”라고 말하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이 역사를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은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이야기하기를 “왜 역사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하길래 내가 말하길 “당신이 서울대 출신 아니냐, 서울대에서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냐.” 라고 했습니다. 이 전 총리도 그것 까지는 몰랐다고 합디다. 한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이홍구 전 총리처럼 “백암(박은식)과 단재(신채호)의 역사만 바로 세워도 고대사는 끝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명색이 역사교수라는 사람이 “단재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고,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말했다는 것 아닙니까? 요즘은 자기 입으로 식민사학 한다는 사람은 없어요, 총론으로는 다 식민사학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다 식민사학이예요. 한마디로 양두구육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해방 전후사에서 어쨌든 민족의 구심력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전부 높게 평가합니다. 반대로 원심력을 찾으려는 사람, 즉 분단이 되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부정하면서, 어렵더라도 구심력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구심력을 찾았던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어떤 분들이 이런 노력을 했는지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임시정부기념관 추진위원장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오는 11월 우당역사문화강좌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을 강의하기 위해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단재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단재의 사상이 우리 역사의 뼈대라고 생각하며, 무엇보다 임시정부 기념관 사업을 통해 근현대사의 인물들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우당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무장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고, 손자인 그는 식민사관을 척결하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80대 노구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의 노력이 꼭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면서 우당기념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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